[5분 칼럼] 조롱과 역경 극복하고 과학의 정점에 선 ‘백신의 어머니’ 커털린 커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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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칼럼] 조롱과 역경 극복하고 과학의 정점에 선 ‘백신의 어머니’ 커털린 커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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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칼럼

“아하, 그런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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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팀

조롱과 역경 극복하고 과학의 정점에 선 ‘백신의 어머니’ 커털린 커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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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여름휴가를 마치고 연구실을 찾은 스코틀랜드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특이한 푸른 곰팡이를 발견했다. 실수로 열어놓은 배양 접시 안에서 자란 이 곰팡이는 플레밍이 연구하던 포도상 구균을 파괴하고 있었다. 인류가 첫 항생제이자 ‘20세기 최고 발명품’이라는 페니실린을 얻게 된 순간이었다. 플레밍 사례처럼 세상을 바꾸는 혁신은 뜻밖의 행운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1997년 펜실베이니아 의대 전염병 학과장으로 갓 부임한 드루 와이스먼과 계약직 여교수 커털린 커리코(Katalin Kariko·1955~)의 만남도 우연이었다. 전혀 다른 부서의 두 사람은 학교 복도의 제록스 복사기 앞에서 자주 마주쳤다. 도서관에서 논문을 구해 일일이 복사하던 시절이었고, 두 사람은 비슷한 시간에 먼저 복사기를 차지하려는 경쟁을 벌이다 친해졌다. 와이스먼은 에이즈를 비롯한 바이러스 연구에 단백질을 활용하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와이스먼에게 커리코가 말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이 바로 내가 하는 일이에요.” 이 대화가 생명공학과 의학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둘은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미국행 편도 티켓과 전 재산 147만원

커리코는 헝가리 커르처그의 가난한 정육점 딸로 태어났다. 갈대로 지붕을 얹은 흙벽돌 빈민가 집은 냉장고와 텔레비전이 없음은 물론 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커리코가 기댈 곳은 공부뿐이었다. 8학년 때는 헝가리 생물 올림피아드에서 3위를 차지했다. 1978년 세게드대에서 생물학 학사를 받았고, 1982년에는 유전 물질 리보핵산(RNA)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헝가리 생물학 연구센터(BRC)에서 일할 때 커리코는 헝가리 비밀경찰 정보원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해고하겠다거나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면서 “실제로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의 연구실은 1985년 연구비 지원 중단으로 문을 닫았다. 유럽 대학 문을 두드렸지만 누구도 답을 주지 않자 미국행을 결심했다. 커리코와 남편은 차를 팔아 편도 비행기 표를 사고 나머지 돈은 두 살짜리 딸의 곰 인형 배에 넣어 밀반출했다. 당시 공산 국가인 헝가리에서 100달러 이상 해외 반출은 금지돼 있는 시절이었다. 900파운드(약 147만원)가 당시 이 가족의 전 재산이었다. 커리코는 손수 꿰맨 이 곰 인형을 아직도 딸의 방에 보관하고 있다. 커리코는 템플대에서 3년간 일하며 전공인 RNA를 활용해 에이즈, 혈액 질환 등을 치료하는 임상 시험에 참여했다. 도서관이 오후 11시에 문을 닫을 때까지 논문을 읽다가, 친구 집에서 자거나 사무실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잠들었다. 아침 6시부터 실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고 결국 계약이 해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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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도시이야기] 런던 수정궁, 파리 에펠탑 그리고 서울의 롯데월드타워

근대 시민사회를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건축물이 두 개 있다. 런던의 수정궁과 파리의 에펠탑이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산업구조가 농업에서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공업으로 변화되었다. 다양한 제품이 새롭게 만들어졌고, 이 물건들을 소개할 장소가 필요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엑스포다. 1851년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첫 박람회가 열렸다. 이때 제품을 야외에 전시할 수 없다 보니 철과 유리로 대형 실내 건축물을 만들었다. 조셉 팩스턴이 설계한 햇빛이 잘 드는 이 건물을 사람들은 수정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궁전이라고 해서 ‘수정궁’이라고 불렀다. 길이 564m의 거대한 실내 공간은 건설에 1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거대한 유리 온실 같은 수정궁에는 나무도 심기고 분수도 있어서 실내 공간이 아닌 야외 공간이라는 착각을 일으켰다.

엑스포 주최 측은 수정궁에 사람이 많이 모이면 폭동이 일어날 것을 걱정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사람들은 전시된 물건들과 신기한 공간을 보고 즐기기에 바빴다. 설혜심 교수의 저서 ‘소비의 역사’는 수정궁은 새로운 ‘소비자’라는 계층을 탄생시켰다고 설명한다. 과거에는 귀족과 천민으로 나뉘던 계급사회였다면 근대사회에는 소비자 계급이 탄생했다. 산업혁명으로 경제 규모가 커지자 새롭게 만들어진 계층이다. 우리는 쇼핑할 때 소비자가 되고, 소비자는 왕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은 소비를 하면 귀족이 될 수 있는 사회다. 현대인은 돈을 벌어서 소비를 하고 싶어 한다. 소비하는 순간만큼은 계급 상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정궁은 전통적 계급사회를 해체하고 시민사회를 완성시키는 공간이었다. 이는 기존에는 없었던 햇빛이 들어오는 거대한 실내 공간을 만들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극받은 프랑스는 1889년 파리 엑스포에서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서 324m 높이의 에펠탑을 건설하였다. 그렇게 높은 건축물이 가능했던 것은 철이라는 재료와 더불어 엘리베이터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없었다면 300m나 되는 탑을 아무도 걸어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시민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파리에서 가장 높은 에펠탑 전망대로 올라갔다. 보통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은 권력자의 시점이다. 높이 올라가면 나를 노출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을 관찰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보의 불균형은 권력을 만든다. 그래서 펜트하우스가 비싼 것이다. 높이 올라가면 더 멀리 더 넓은 공간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시각적으로 더 많은 공간을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높은 건물들은 권력자의 전유물이었다. 과거에는 높은 건물을 지으려면 엄청난 양의 돌과 노동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귀스타브 에펠은 최소한의 철을 이용해 빠르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을 완성하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공장에서 1만8038개의 철제 부재와 250여만 개의 리벳을 대량생산하고 현장에서 빠르게 조립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시민들이 쉽게 올라가서 파리를 내려다보는 최고 권력자의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 사회에서 최고 권력자는 일반 시민이라는 것을 공간적으로 완성한 건축물이 에펠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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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00] 성채에 홀로 저항하는 작은 책

전시장에 붉은 벽돌을 질서정연하게 쌓아 올려 견고한 벽을 세웠다. 벽 없이 집을 지을 수는 없지만, ‘벽’을 비유적으로 쓸 때는 관계가 완전히 단절됐거나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을 만났다는 의미다. 위압적으로 관람객을 가로막은 이 벽은 글자 그대로 장벽을 마주한 듯 숨 막히게 답답하다. 그러나 이토록 거대한 벽체에 균열을 낸 존재가 있다. 윗면을 다시 보니 한가운데가 불룩 솟았다. 바닥에 깔린 한 권의 책이 벽체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미완으로 남긴 유작, ‘성(城)’이다.

멕시코 출신의 호르헤 멘데스 블레이크(Jorge Méndez Blake·1974~)는 건축가로 교육받고 문학지의 편집자로 일하다 미술가가 됐다. 건축과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이 완벽하게 결합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미술관이었다. 그는 글을 쓰는 건 일종의 건축이고, 글을 읽는 건 새로운 창작이라고 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책이라는 작고 연약한 사물에 담긴 글의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카프카의 ‘성’에서 주인공인 토지 측량사 ‘K’는 성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의 분투는 마치 제아무리 걸으려 해도 납덩이처럼 무거운 발을 움직일 수 없는, 혹은 아무리 한참을 걸어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악몽처럼 끔찍하다. 평론가들은 ‘성’이 억압적인 아버지, 비합리적 지배 체제, 혹은 권위적 종교를 상징한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거대한 벽에 짓눌린 작은 책은 마치 성채에 홀로 저항하는 ‘K’를 보는 것 같다. 블레이크는 아무런 접착제 없이 벽돌을 쌓았다. 누구라도 섣불리 책을 빼내고자 하면 벽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질 것이다.

[윤대현의 마음속 세상 풍경] [164] 혼자 놀기 연습

맞벌이 부부 비율이 거의 50%다. 자주 접하는 맞벌이 부부의 고민 중 한 예를 들어보면 ‘주중에 업무에 지치고 주말에도 자녀 양육에 집중하다 보면 제대로 쉴 수가 없고 부부가 함께하는 힐링 활동은 꿈도 못 꾸니 부부 사이도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는 내용이다.

원앙 부부도 동시에 마음 에너지가 고갈되는 번아웃이 찾아오면 부부 갈등이 심해지기 쉽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은 커지는 반면 공감 능력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쪽이 힘들다고 하면 상대방이 애정을 가지고 받아줄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동시에 번아웃이 오면 소통이 짜증으로 끝나기 쉽다. ‘나 요즘 너무 힘들어’에 ‘그렇지 미안해.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가 아니라 ‘너만 힘든 것 아니야’ 하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가 나쁜 것이 아니라, 함께 노력하며 열심히 살다 보니 마음이 지친 것인데, 생각지 못하게 소통이 이렇게 진행되다 보면 관계가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엔 ‘연인으로 만나기’를 권한다. 자녀는 사랑의 선물이다. 그런데 양육하다 지치면 부부간에 이성으로 느끼던 사랑의 감정은 약해지기 쉽다. 그냥 ‘엄마 아빠 동호회’ 같은 느낌이 든다는 고민도 접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자녀를 가족 등에게 맡기고 맛집 탐방이나 영화 관람 같은 데이트를 연인 느낌으로 즐기는 것이다. 이때 자녀 이야기는 데이트 뒤로 미루고 부모가 아닌 연인으로 소통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면 좋다.

[기자의시각] 정율성은 심지어 6·25 戰犯이다

북·중공 군가 작곡가 정율성 논란의 핵심은 그가 대한민국 영토에 혈세로 기념 공원까지 지으면서 기려야 할 대상이 맞느냐다. “그는 뛰어난 음악가” “중국 관광객 유치에 필요” “과거 정부도 인정” “한중 우호의 상징” “분단의 산물” 등 말이 많지만 다 곁가지다. 정율성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될 일이다.

사실관계는 간단하다. 그는 1914년 광주(光州)에서 태어났다. 중국에 넘어가 1938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 해 ‘팔로군 행진곡(중국공산당 군가)’을 작곡했다. 북한에는 1945년 12월 넘어갔다. 인민위원회 간부가 됐고, 노동당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도 됐다. 이듬해 김일성을 대면했다. 그냥 작곡가가 아니라 당 간부였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잘 몰랐던 사실이 있다. 그는 한국군으로 치면 북한의 영관급 장교였다. 정율성은 1947년 북한 인민군 소좌(한국의 소령)로 보안간부훈련대대부 부장이었다. 인민군 정복을 입고 아내와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협주단 단장도 겸하며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김일성 정권·북한군 찬양가 30여 곡을 작곡하고 전국을 돌며 200여 차례 공연했다. 그 공로로 1948년 11월 김일성 포상장을 받았다.

정율성은 6·25 대남 침략 전쟁에 참전했다. 전범 인사다. 인공기가 휘날리는 ‘점령 서울’에서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직후까지 머물다 중국으로 피신하고 중국으로 귀화했다. 이듬해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이 1·4후퇴로 밀리자 정율성은 중공군 장교로 중공군과 함께 다시 서울을 점령하고 시내를 돌며 조선궁정악보 등 유물을 약탈해갔다.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과 중공군을 찬양하는 노래를 짓다 중국에서 1976년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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