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포크(Belle Époque)란 한 나라의 ‘아름다운 시절’을 회고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전쟁 없는 평화기에 국민 대다수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 문화적 융성을 구가하던 일종의 ‘태평성대’다. 주로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의 프랑스를 지칭하나 그 무렵 많은 서유럽 국가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상대적이긴 하나 모든 나라 역사에는 나름의 벨 에포크가 있다. 인생으로 치면 삶이 꽃이 되어 빛나는 순간, 곧 ‘화양연화’(花樣年華)라고나 할까.
개인적 생각에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벨 에포크는 1987년부터 1997년까지의 10년 정도다. 우선 탈냉전 시대 남북한 국력 격차 심화와 함께 전쟁 공포가 크게 줄었다.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돌파하며 고도 대중소비 시대가 시작되었고, 6·29선언 이후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다. 88올림픽을 전후하여 세계화의 빗장 또한 활짝 열렸다. ‘3당 통합’이나 ‘DJP 연합’ 등을 통해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정치 본연의 존재 이유가 돋보이기도 했다.
그 무렵 정부는 OECD 가입을 통해 대망의 선진국 진입을 대내외에 자랑했고, 35년간 이어지던 ‘5개년 계획’ 또한 보란 듯 버렸다. 학계에서도 자화자찬이 유행했다. 소위 ‘아시아적 가치’ 담론은 유교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전통 속에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이행의 인자(因子)가 본래 들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세계화가 결코 서구문명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으로, 한국사의 오랜 열등감까지 떨쳐낼 기세였다. 하지만 축배는 독배가 되었다. IMF 국가부도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의 전무후무한 호(好)시절은 민본주의와 실용정신의 개가였다. 신생 분단국가로서 살아남는 것만큼 간절한 희망은 없었고, 먹고사는 것만큼 절박한 소망도 없었다. 이에 이승만·박정희 시대는 조선조의 공리공론 정치와 해방정국의 이념전쟁에서 벗어나 국정의 방점을 부국강병 및 민생·민부(民富)에 확실히 찍었다. 국민 대다수는 일이 곧 삶이던 열정의 시대에 동참했고, 개인보다는 나라, 현재보다는 미래를 더 중시하는 희생의 미덕을 감수했다. 산업현장에서는 물론 학생운동도 그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