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기사로 말하고, 학자는 논문으로 말하고,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 기자의 기사는 데스크가 검토하고, 학자의 논문은 동료 심사를 거치지만 판사의 판결문은 사전 검증 절차가 없다. 오보를 낸 기자는 소송당하고, 자료를 조작한 학자는 매장당하는데, 잘못된 판결문을 쓴 판사는 사후 처벌을 받지 않는다. 모든 문명국 재판은 3심제로 운영되나 상급심 판결로 하급심의 오류가 드러나도 판사는 문책당하지 않는다.
헌법은 판사들에게만 왜 그토록 커다란 특권을 보장하는가? 판사들이 고귀한 선민(選民)이거나 특출한 인재라서가 아니다. 단지 그들이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해야 하는 막중한 사법의 책무를 지기 때문이다. 만약 판사가 그 막중한 책무를 저버리고 법의 정신에 반하는 부당한 판결을 내놓는다면,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은 어떻게 법관의 독재에 맞설 것인가?
불과 몇 년 전 법원은 전직 대통령 두 명을 위시한 고위 공직자들을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며 무더기로 구속했다. 당시 영장판사들이 휘두른 법의 칼날은 사무라이 진검보다도 서슬이 퍼렜다. 무죄 추정이나 불구속 재판 원칙은 거론되지도 않았다. 법원은 전직 대통령을 잡아넣고선 반년 후 다시 반년 구속을 연장했고, 매주 4차례씩 공판을 이어갔다.
그랬던 법원이 특대형 비리 혐의에 휘말려 제 입으로 50년 형을 운운하는 야당 대표를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며 풀어주었다. 피의자가 경기도지사 당시 위증을 교사한 혐의는 이미 소명됐다면서도 동일 인물이 야당 대표 신분이라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판사의 결정문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법치 국가 사법부의 모든 결정은 형평성과 일관성을 갖춰야 한다. 어느 사회나 법의 생명은 진실성(integrity)에 있다. 저명한 법학자 드워킨(Ronald Dworkin)이 웅변하듯 “국가는 한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전직 대통령과 관련 피고인들을 수갑 채우거나 포승줄로 묶어 언론에 노출하는 문화혁명식 인격 살해를 일삼았던 법원이다. 이제 와 현직 야당 대표에게만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니 무원칙하고, 불공정하고, 비논리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사법의 원칙과 기준이 정세에 따라, 판사의 성향에 따라 표변하면 누가 법원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