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법 제정 뒤에도 여순사건에 어른거리는 몹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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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법 제정 뒤에도 여순사건에 어른거리는 몹쓸 그림자

여행매거진 0 637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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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만도 여남은 차례, 주말 짬 날 때마다 찾았는데 그곳엔 늘 아무도 없었다. 이태 전 '여순 사건 특별법'이 제정, 시행되던 때 잠깐, 그리고 올해 말까지 희생자와 유족 신고 기간을 연장한다는 내용을 담은 시행령 개정안이 통과된 올 초 잠깐 북적이더니 다시 인적이 끊겼다. 여순 사건 관련 사적지 주변은 무더운 여름 바람조차 서늘함이 감돌았다.
 
사람 대신 특별법 제정과 시행령 통과를 경축하는 빛바랜 현수막만 펄럭인다. 거기엔 어김없이 특정 정당과 정치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언뜻 극우 이미지를 세탁하려는 보수 정당과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홍보용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늘 그래왔듯, 법 제정을 요구해온 숱한 시민들의 땀과 눈물은 의정 활동 성과로 귀결되며 그들의 독차지가 된다.
 
특별법의 제정은 '이제 여순 사건에 대해 속 터놓고 말해도 좋다'는 뜻일 테다. 국가가 해코지 안 할 테니, 겪은 대로 본 대로 사실을 고백하라는 거다. 그러나 여전히 국가의 '진심'을 의심하는 희생자와 유족들은 지난 70여 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좀처럼 입 밖으로 내려 하지 않는다. 그만큼 국가로부터 입은 상처와 고통이 크고도 깊기 때문이다.
 
사망자만 최소 1만 1천여 명... 대부분 민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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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쯤 먼 친인척 중에 여순 사건 당시 좌익으로 몰려 피신한 뒤 행방불명된 이가 있어 유족을 부러 찾아가 특별법의 취지를 설명하고 신고를 권유한 적이 있다. 팔순의 유족은 일언지하 거절했고, 더는 여순 사건이라는 말조차 꺼내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이 바뀔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여럿 죽임을 당하는 꼴을 봤다며 몸서리를 쳤다.
 
그가 말한 '세상'은 '권력'을 의미한다. 당시 봉기군과 토벌군이 차례로 도시를 장악하면서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었던 애먼 민중들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그는 14연대 봉기군에 의해 처형당한 친일 지주들과 경찰을 여럿 봤고, 토벌군에 의해 부역자로 몰려 참혹하게 희생된 뒤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는 숱한 주검들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사망자만 최소 1만 1천여 명(당시 전라남도 당국 통계)에 이르는 희생자의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봉기군과 토벌군 사이의 교전 중 사망한 이들은 많지 않았고, 사건이 진압된 후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토벌군이 학살한 경우가 대다수였다는 건 연구자들의 일치된 견해다. 일부는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2만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됐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이후 6.25 전쟁이 터지며, 당시의 토벌군은 북한군의 남침에 맞서 전장에 투입됐다.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그들은 '공산 괴뢰 집단'의 야욕을 막아낸 '애국자'로 칭송받게 됐고,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여순 사건의 희생자들은 반국가세력, 곧 '빨갱이'로 규정됐다. '빨갱이'여서 죽인 게 아니라, '애국자'가 죽였으므로 그들은 '빨갱이'가 되어야만 했던 거다.
 
여순 사건의 부역자 색출이 마무리되던 그해 12월 1일, 일제가 만든 '치안유지법'을 본뜬 국가보안법이 제정됐다. '반공'은 우리 사회의 '국민 윤리'이자 행동 지침이 됐다. '빨갱이'로 낙인찍힌 여순 사건의 유족들은 서슬 퍼런 연좌제의 굴레 속에 출세의 욕망을 접어야 했다. '신원조회'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헌법상 기본권인 공무담임권조차 제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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